학교에서 크리틱은 중요하다. 자기 작업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서, 타인의 영향을 적절히 생산적으로 제어하는 훈련으로서, 서로 다른 평가와 판단의 소나기 속에서 자기 확신을 가다듬는 단련으로서, 다른 사람 작품을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자기 작업을 돌이켜보는 기회로서 그렇다. 물론, 크리틱은 격투다. 또는 그래야 마땅하다. "다양한 관점과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 운운하며 그저 상대를 토닥거리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크리틱이 아니라 다과회를 하는 게 좋다.
그러나 격투에도 일정한 예절이 있듯이, 크리틱에도 예절이 있을 법하다. 물론 형식적 예절을 내세워 자유로운, 때로는 뜨거운 설전이 오가는 일을 막는 것도 문제겠지만, 반대로 간단한 예절을 지키지 않아 공연히 분위기를 냉각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도 크리틱 예절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런저런 크리틱을 겪으면서 필요하다고 느낀 예절이 몇몇 있다.
1) 작품을 발표하고 크리틱을 받는 측
- 현학적인 표현을 남용하지 말자. 개념어를 부적절하게 남용하면, 그 개념어에 익숙한 이에게는 부실한 작품을 포장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고,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자신을 압도하려 한다는 불쾌감을 산다. 특정 개념이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 개념을 크리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최소한 대부분이 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면, 그 개념을 먼저 간단히 설명하거나, 아니면 아예 개념어를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다. 개념어를 쓰는 목적은 소통을 명확하고 경제적으로 하는 데 있는데, 5분 발표하면서 특정 개념어 설명에 3분을 써버리는 건 절대로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다.
- 자신이 느끼기에 부적절하거나 '멍청한' 제안을 받더라도, 제안한 이를 무시하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 표정 관리도 중요하다. 이는 일반적 예의범절을 떠나, 원활한 크리틱에 꼭 필요한 자세다. '멍청한 제안이나 질문을 하면 무시당하는구나'라는 느낌이 퍼지면 활발한 토론이 어려워진다.
-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는 피하자. 어차피 자기 작업은 자기 것이고, 그에 대한 결정은 자기 몫이다. 자기 작품을 공격하는 비판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리 적대적인 비평자를 만났다 해도 그가 자기 작품에 대한 결정권마저 빼앗아가지는 못한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 비평하는 측에서는 부담을 느끼고, '에이, 그냥 넘어가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크리틱에 참여해 작품을 발표하는 목적이 '그냥 넘어가는' 데에 있다면 할 말 없다. (거꾸로, 독하고 변태적인 비평자라면 그처럼 방어적인 사람을 괴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테고, 때로는 그 충동을 행동에 옮길 것이며, 유능한 비평자라면 괴멸에 성공할 것이다. 자기 작업에 방어적인 이가 이런 결과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 자기 작품이나 그에 대한 설명에 타인이 원하는 만큼 집중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핀잔하지 말자. 예컨대 어떤 지적이나 질문에 대해 습관적으로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아까 설명했는데요..."라는 말로 답을 여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듣는 사람은 "아까 설명했는데요" 뒤에 생략된 "(이 바보야)"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한숨을 쉬는 건 당연히 최악이다. 상대방이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 작품을 봐주는 데 고마워해야 한다.
- 격투기-크리틱에서 공격법이나 방어법 연습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비평해오는 상대방의 일관성을 거론함으로써 제 작품을 방어하는 태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당신 아까 다른 사람 작품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잖아!"라거나 나아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그런 생각에서 작업을 하느냐?" 따위가 그렇다. 크리틱 룸은 법정이 아니다. 크리틱에서 다른 사람 작품을 비평하는 측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의무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좋은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만 비평할 자격이 있다는 느낌이 퍼지는 것도 곤란하다.)
2) 타인의 작품을 크리틱하는 측
- 현학적인 표현을 남용하지 말자. 개념어를 부적절하게 남용하면, 그 개념어에 익숙한 이에게는 부실한 관찰을 포장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고,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자신을 압도하려 한다는 불쾌감을 산다. 특정 개념이 자기 견해를 밝히는 데 꼭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 개념을 크리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최소한 대부분이 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면, 그 개념을 먼저 간단히 설명하거나, 아니면 아예 개념어를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다. 개념어를 쓰는 목적은 소통을 명확하고 경제적으로 하는 데 있는데, 1분 비평하면서 특정 개념어 설명에 3분을 써버리는 건 절대로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다.
- 위 예절의 연장선으로서, 함부로 비교하지 말자. 예컨대 뜬금없이 "네 작품은 일리야 카바코프를 연상시킨다" 어쩌고 하면서 다른 -- 생소한! -- 인물이나 작품을 거론하는 건, 그것이 칭찬이건 비난이건 간에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 논평을 빙자한 자기 자랑에 그치기 쉽다. 문제는 그런 자기 자랑이 생각보다 쉽게 간파된다는 것.
- '일반 대중' 등 불특정 다수를 동원해 주관적 견해를 일반화하려 하지 말자. 특히 디자인 크리틱에서 "일반 대중은 이해하지 못할 듯" 현상이 심하다. 그냥 솔직히 "나는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하면 된다.
- 비평할 때, 선생이나 상급자 등 그 자리에 있는 '권위자'에게 호소하려 하지 말자. 발표자를 직접 겨냥하거나 배려하기보다, 권위자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비평은 비릿하다. 심지어 비평을 하면서 대화 상대인 발표자가 아니라 선생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태도는 자기 생각보다 훨씬 빤히 드러난다.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 불쾌한 비평자는 별로 없다.
- 위 예절의 응용으로서, 비평을 하며 다른 청중의 마음을 사려 하지도 말자.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를 매개 또는 희생양 삼아 동료 사이에서 자기 영향력을 퍼뜨리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물론 이런 싸움법이 일반 '평단'에서는 필요하거나 최소한 용인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학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내 생각에 학교에서 크리틱은, 본질상 비대칭적이지만(발표자와 비평자/청중은 근본적으로 다른 위상에서 토론에 참여한다) 그럼에도 작가와 감상자의 직접적인 대화를 전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크리틱에 쓰이는 온갖 전략, 전술, 감언이설, 수사, 재치, 지성 등등은, 결국 '나와 너'가 작가 대 감상자로서 '대화'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나머지 정치는 기껏해야 나머지에 불과함을 동의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예절이 있겠으나, 우선 생각나는 건 이 정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모두 상식을 존중하면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예절이다. 그런데 상식적 예절조차 지키기가 어려우니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