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은 미국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 예술평론가.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그녀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숱한 별명과 명성을 얻었다.
1933년 1월 28일 뉴욕에서 태어난 수전 손택은 15세에 버클리대에 입학, 시카고대로 다시옮겨 대학생활을 시작한 뒤 17세에 결혼, 25살 때 하버드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각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는 등 세인의 주목을 받아왔다.
수전 손택이 문단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1세 되던 해(1964년)에 발표한 <해석에 반대한다>와 <캠프에 대한 단상>이라는 두 편의 글 때문이었다.
당시는 마침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던 해여서,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 도전한 손택의 두 에세이는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포한 피들러의 글과 더불어 1960년대 반(反)문화의 서장을 연 기념비적 선언문이 되었다.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에서 고정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주창한다. 손택은 그것을 '예술의 성애학'이라고 부르며, 해석을 위한 해석을 비판한다.
그녀에 의하면, 예술의 본질은 강간이 아니라 유혹인데,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해석은 예술에 대한 강간 행위가 된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
수전 손택의 '반해석론'은 <캠프에 대한 단상>에서도 계속된다. 그녀는 여기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전통관념을 비판하며, 비평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심미적인 체험을 제시한다.
'캠프'는 조악한 것, 인위적인 것, 과장된 것, 끔찍한 것에 대한 취미를 말한다. 그녀는 스스로 '캠프'라고 부른 반전통적, 반귀족적 문화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시대의 지성의 대변자로 등장했다. 그녀는 예술작품에 대한 과도한 분석을 경계했으며, '해석지상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수전 손택은 <화산의 연인>, <미국에서(In America)>등의 소설 외에도 사회과학사의 입장에서 해석한 <사진 이야기(On Photography)>등 여러 글을 저술했으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녀는 베트남전쟁의 허위,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을 폭로하는가 하면 미국 펜클럽회장으로 있던 88년에는 서울을 방문해 구속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고 93년엔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다.
2002년 9월 미국의 9.11테러 1주년을 맞이해 수전 손택은 뉴욕타임스에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란 기고문을 실었는데, 그녀는 ""대테러전쟁은 암이나 빈곤, 마약과의 전쟁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은유적' 전쟁에 불과하다""며 ""그럼에도 미 행정부가 전쟁을 선포한 것은 미국의 힘을 무한정 사용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했다.
수전 손택은 2004년 12월 28일 백혈병으로 숨졌다.
2009년 6월 1일 월요일
Susan sontag
첫 : 김혜순
첫
김혜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올 때 거기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 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어머니의 첫 젖 같은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속에 숨어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있을까
그 옛날 당신의 몸 속에서 뿜어지던
엄마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몸이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속으로 기러기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뱃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먹던 첫사랑이여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숨어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 이라고 부르른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잡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긋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08년 12월 5일 삶에 관한 주저리
요즘 들어서는 세상에 아주 다양한 노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것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 승리자가 된다거나 나락으로 떨어져 패배자가 되다는 많은 이들의 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사실 일 수도 있다. 사회가 이런 경쟁체제가 된 것은 오래 된 일이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것은 순환하는 것이 아닐까.
의사, 선생님, 청소부, 대통령, 노점상, 화이트칼라. 이런 심심한 삶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다른, 샐 수도 없이 다양한 삶이 살았다가 죽어지는 것이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지지 않으면 필 수 없다. 모든 건 시작이자 끝이며 끝이고 시작이다. 내가 죽어야 다른 이들의 생명이 피고 모든 것은 왔다가 간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부러워한다던가 시기할 필요가 없다. 많은 곳에서 자꾸 나를 비교하고 높은 곳으로 가라고 요구하지만 그곳에 정상이 있기나 할까.
그저 내 자신에게 충실하며, 내 노선을 충실히 걸어가자.
앨리너 파전의 말처럼 세상에는 온갖 것들이 필요한 법이다
2007년 10월 1일 한계에 관한 주저리
한계를 봤기 때문에 이제는 나를 채워나가는 것 또한 열중해야 한다. 나를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을까?
가끔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자꾸 받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지금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것은 채워지기 힘들겠지.
홀로서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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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한계를 본다고 이야기 했는데 실제로 나의 부족한 점을 많이 본다. 그건 주위에서도 나에게 쉴새없이 말하고 나도 문득문득 느낀다. 행복하다고 해야겠다. 그것 덕에 나는 끊임없이 도전 할 수 있고 행동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성장한다.
죽을 때까지 나는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완벽하기를 노력하는 것과,그냥 완벽하기를 노력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할 수 없는 나라서 행복하다.
+어쩜 어떤 사람들은 죽음으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닐까?
2007년 9월 28일 무대에 관한 주저리
내가 무대를 사랑하는 이유중에 하나는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자기몰아넣기에 있다.
이 무대에서 이것을 해야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일단 그곳으로 날 몰아넣는다.
상당히 자극적이며 순간의 찰나이다. 끝없는 갈증에 타있는 것 같고 뜨거운 불속에 있는 듯 하면서도 등뒤와 가슴으로 얼음조각들이 흘러내린다.
그 후 결정이 난다. 난 이미 그 목표를 넘어있다. 혹은 넘어있지 않다.
결과가 어떻든 그 찰나는 나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간다. 나는 그것을 에너지삼아 다른 무대가 오면 또 한번 날 몰아넣는다.
완벽한 올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2008년 12월 10일의 주저리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먹고 살기는
어떻게보면 굉장히 단순한 명제이기도 하지만
어떻게보면 모호한 꼬인 명제이기도 하다.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이며 먹고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인지 파고 들어가면 많은 가치들의 경계들이 모호해지고 이상적인 삶은 먼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
내 생각으로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아니 사실 그들의 맘 속으로 들어가 보면 환경적으로는 이상적이나 그 외의 가치나 관계, 소통 등 자의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끊임 없이 그의 이상적인 삶을 파괴하려 들것이다.
60억 인구가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니 지구상에 그것보다 적은 량의 인간이 산다하여도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없어져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보노보에 관한 글을 보면서 이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계사회,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평상시에 평등한 관계, 긴장된 관계를 싸움이 아닌 섹스로 푸는 종족. 얼마나 평화롭고 조화로운 종족일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지금 인간은 보노보나 몇 만년전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보노보, 침팬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사냥을 하지 않고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사고 그 고기를 사기 위해 많은 동물들이 죽고 그 동물들은
게다가 인간의 커다란 역사는 "평화-폭력-살인-전쟁-핵전쟁-?"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신기하게도) 끊임없이 평등하려고 애쓰며 자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만인을 향한 투쟁이라고 하지만 법이나 규칙의 초기 시작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삶에 관한 끝없는 의심이나 아픔, 배신감, 두려움, 먹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죽을때까지 있고 설령 내가 팔십살이 된다고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인간이기에 친구나 동료처럼 갖고 가야할 내면의 나이다.
우리는 항상 100%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이렇게 풀고 가야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은 끝이없지만 내 존재 자체는 세상의 한 톱니바퀴로 존재할 것이며 나의 생각은 세상 속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