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5일 토요일

what's the matter, Momma?

I'm dying. Forrest. Come on in. sit down over here.

why are you dying. Momma?

It's my time. It's just my time. Oh, now. don't you be afraid. sweetheart. Death is just a part of life. It's something we're all destined to do. I didn't know it. but I was destined to be your momma. I did the best I could.

you did good. Momma.

well. I happened to believe you make your own destiny. You have to do the best with what god gave you.

What's my destiny. Momma?

You're gonna have to figure that out yourself. Life is a box of chocolates. Forrest.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바보다!

Sent at 2:00 AM on Saturday

홍대다니고 신금호 사는 정택주씨


:
가위바위보가 아니라
-_-
아 미안
나의 센스란
-_-
ㅋㅋㅋ

(가위바위보와 묵찌빠를 헛갈린줄 알았더니
아예 이상한 뜻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그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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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정택주씨)

1. 왜 살까?

라고 묻자

삼치 : 최악의 대답이랑 그저 그런 대답 중에 골라봐
날샤 : 최악의 대답
삼치 : 못죽어서
날샤 : ㅠㅠㅠ 그럼 그저 그런 대답은 뭐야
삼치: 세상은 살만하니까



2. 방금 "우주의 꽃, 생명의 몸짓" 이라는 한일 장애우 협동공연을 보고 왔다.
 -> 함께하는 공연은 맨 마지막 노래부르기 밖에 없어 사실 '협연'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하나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바다건너 몸이 불편한 사람들끼리 장기간 공연연습을 하는게 오죽 쉬울까.
갈 때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러닝타임은 3시간이나 되었다.

한국팀은 석문호흡 한무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국무용은 진하고 깊숙하다)
 합창 그리고 밴드공연을 하였고
일본에서 온 쇼난카메구미팀은 팬터마임을 보여주었다.

미카엘의 집이라는 복지회에서 온 밴드팀이 공연을 하는데 한 아이가 내 정도 또래되는 남자아이에 시각장애를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일 젊고 씩씩하고 패기가 넘쳐 -그리고 정신적인 장애는 갖고 있지 않아- 팀의 리더역을 하는 듯 보였다.

난 잠시 그가 시각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베이시스트가 되는 상상을 하였다.

그는 베이스를 아주 잘 쳤다.
여행을 떠나요 곡이 끝나자 조금 떨리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쉽게 칠 수 있게 베이스에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곡들을 저희 수준에 따라서 편곡을 하며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럼 다음 곡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눈물이 넘쳐흘렀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맘도 있었고
잠시나마 세계적인 베이시스트라는 명성으로 그의 삶이 구원될 수도 있을거라고 -얄팍하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이어지는 일본팀의 팬터마임 공연에서도 눈을 땔 수 없었다.
특히 불이라는 제목의 부토춤. 마치 죽어있는 시체가 딱딱한 몸을 이끌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두 분이 나와 춤을 췄는데 한 분은 비장애인이 한 분은 장애인이었다.

신체로 표현하는 것, 감정을 끄집어 내는 것. 혹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관객이 그 안에 있는 본질을 파악하게 되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끈질기게 진행되었던 공연은 뭐랄까. 치유음악을 보고온 느낌이랄까. 그들은 에너지가 없다기 보단 우리와 다른 에너지를 훨씬 많이 갖고있었다.
공연 중간에 문이 뒤돌아 나를 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


3.그러고 보니 니체는 결국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미쳤다.
한 때는 니체가 미친 것이야 말로 위버멘시가 없는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삶의 모든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압박을 견디며 살아온
대부분의 이가 위버멘시일 수도 있지 않을가 싶다.
삼치는 죽지못해 산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이야 말로 운명애 아닐까.

4.
"내게는 용기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의 온갖 낙담을 남김없이 제거해온 용기가....
용기는 더 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2009년 7월 23일 목요일

이천구년칠월이십이일

하루에 꼭 한번은 쓰고, 읽기로 했다.
지금의 나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이런 일이다.
불타는 연애나 화끈한 감정의 나락보다는
소소하게 나를 정리하고 다져나갈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공부'와 '토론' 그리고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쩌면 불타는 마음과 움직임은 공연을 하면서 다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 오늘 당산역에서 집으로 오는데 지하철 역사에서 승무원이 혼자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는 너무 피곤하고 또한 지루해보였다. 나는 웬지 그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그 의자뿐이 없는거구나 싶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 역사에 승무원이 적어도 두 세명은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은 마그네틱 표를 팔고 카드를 충전해주고 불법시승을 한 사람들이 없는지 관찰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카드 표를 끊어주고 교통 카드를 충전해주는 덩치 큰 기계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사람들이 잘 내리고 타는지, 불법시승을 한 사람들이 없는지 관찰하는 일 뿐이다.
 이렇게 기계가 사람을 대신해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지하철 1호선의 어떤 구간은 지하철 승무원이 없이 기계 스스로 가기도 한다.

 그들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자본가가 건물을 세울 때 비싼 로봇값을 내느니 (사실 그런 로봇이 있지도 않지만) 싼 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막노동일?
위험한 공장일?
가게주인? 알바?
기계에게 쫓겨난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승무원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지하철 승객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기계의 딱딱한 터치패드를 만질 때 승무원들의 얼굴을 마주치는 것을 추억하는 이들이 있을까?
후에 인공지능 로봇이 나왔을 때 인간은 로봇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는 걸까?


2.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우리 집 앞에 '왕에 두마리 치킨' 집이 있었는데 어느날 없어졌다. 나 그치킨 좋아했었는데.. 그 옆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물이 우뚝 세워졌다.
당산역에 9호선 전철역이 들어왔는데 길 닦아 놓은 것 보면 한마디로 '삐까뻔쩍'하다.
콘크리트 바닥이었던 한강변이 다 뜯어지고 일주일 뒤에는 초록 잔디밭이 들어왔다. 그 잔디는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있는 듯 하다.

내 주위에, 내 동네에 30년이 넘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어떤 전설도, 이야기도, 사람도 오래 된 것이 없다. 심지어 내 마을도 없다.
오래 된 것들은 쉰내 나는 취급 당하며 저 구석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그 오래 된 것들을 추억하는 이들은 노인이다.
하자 센터 앞마당의 공사가 시작 되자 앞 뒤로 바리게이트가 쳐졌는데
그곳에서 매일 산책을 하던 노인이 슬픈 눈으로 바리게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을 나는 봤다.

이런 흐름 속에 나는 긴호흡을 갖기 힘들다.
너가 어떻게 변하는지, 저것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것에 맞추어 나는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어졌다.

가끔씩 그 변화는 '새 것' 뿐만이 아니라 편의성을 위해 오기도 한다.
요즘 강산이 성미산에 중고등학교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나도 그에 찬성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찬성, 반대 두 파로 나뉘어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값과 자신의 자식들이 좋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싶게 한다는 것이 이유다. (지금 있는 중고등학교는 면적이 좁아 화장실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문제는 인간이냐 아니면 또다른 가치들이 존재하고 있냐(물론 궁극적으로는 그 또한 인간을 위한 것이 되겠지만)로 되어버린다.
우리가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하냐.
인간의 많은 문제들은 원론적으로는 결국 이 고민이 존재하고 있는 듯 하다.

근데 누가 말하길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단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가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도
나,너,우리,이곳을 중시한다면 결국 답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3. 나는 왜 카페에 가나
요즘 맨날 홍대간다

카페가러
카페에서 뭐하는데
작업, 그리고 이야기?

나 아무래도 바람기가 있다. 어디론가 가고싶은가 보다.
지금은 엉덩이에 힘빡주고 앉아있을 땐데.
돈안쓰고 내 일에 생산적일 수 있는 방법으로 놀고싶다.

2009년 7월 12일 일요일

세여자

참우끼다
몇년전만해도이런세여자가뭉칠날을생각이라도했나
세소녀라고불리기엔이제너무찜찜해버린녀자들
주말만되면서로볼려고몸이달아오른다
만나면이런저런궁실저실남자여자명박노짱연애연분
아이고빡씨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당산

당산 []
요약
수호신이 있다고 하는 마을 가까이의 산이나 언덕.
장소 마을 인근 산 또는 언덕
건축목적 마을의 안녕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
거북돌 당산 /

가장 원초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로,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산과 언덕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현상은 나 자신은 물론 마을사람들의 평안을 지켜주는 힘을 가진 존재라고 믿었으므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당산에 사당을 지어 놓은 곳도 있고 큰 돌로 제상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호모 쿵푸스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p.112-116 / p.161-162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의 주기가 짧은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내안에 사랑을 지속할 힘과 에너지가 충만하지 않으면 대상에 상관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게 연애다. 또 설령 외모가 출중하여 많은 상대로부터 애정공세를 받는다 한들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와 대상의 삶을 파괴하거나 갉아먹어 버리기 십상이다. 권태 아니면 변태 - 이게 근대인이 통상적으로 밟아가는 '연애의 정석' 이다. 이 두 개의 '뻔한' 코스를 벗어나 나만의 특이하고 강렬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면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랑 따위는 없다. 그러니 운명적 사랑을 하고 싶다면, 내가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그걸 터득하는 길은? 오로지 독서 밖에 없다!

그에 대한 명박한 증거가 바로 '대장금'의 사랑법이다. 잘 알다시피, 영화건 드라마건 대중가요건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주 테마는 연애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랑의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바로 죽음이다. 즉 사랑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한다. 운명적 만남, 불치병, 아니면 불의의 사고. 이런 것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에로스는 타나토스(죽음본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장금의 사랑이 흥미로운 건 이런 식의 공식구를 간단히 해체해버렸다는 데 있다. 그녀의 사랑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분명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장금이의 사랑은 자신들뿐 아니라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살린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길 위에 있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장금이는 아주 일찍부터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 때문에 무얼 못 해본적이 없다. 멜로물들을 볼 때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재벌총수건, 고시생이건, 직업여성이건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일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 남는다. 다시 말해 사랑이 삶을 '몽땅 먹어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삶이 사라진 자리를 사랑이 메웠는데, 사랑은 무상하게 변해간다. 그 무상함을 '불멸의 가치'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연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면 둘 다 죽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지만, 장금이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궁중에서건 유배지에서건, 수라간에서건 내의원에서건 그녀는 늘 뭔가를 배우고 터득해 나간다. 종사관 나리와 친해진 것도 장서각에 있는 책을 빌리는 과정에서다. 책을 사랑하는 장금이, 종사관 나리가 그녀에게 빠진 것도 그때문이다. 책을 읽는 모습, 늘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그녀의 표정이 종사관 나리를 매료시킨 것이다. 또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을 만나고,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말하자면, 그녀는 늘 어디에서건 앎의 코뮌에 접속한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늘 그것들과 함께 간다. 하여, 그녀의 삶이 달라지는 만큼 사랑도 변해간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연인에 대한 사랑은 다른 것들에 비해 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최종심급이 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삶의 모든 과정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함께 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존재론적 표현인 것이다. 이름하여, '걸으면서 사랑하기!'

이런 사랑법에는 실패가 없다. 짝사랑으로 끝나건 실연을 당하건 사랑이란 그 자체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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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랑도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조건이나 상황이, 혹은 나아가 운명이 두 사람의 결합을 방해한다 해도 사랑 자체가 주는 행복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왜냐면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건 그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판단의 기준을 바꾼다면 얼마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짝사랑이 왜 꼭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하기에 따라선 시간과 힘은 덜 들이고, 신체적 활력과 삶의 의욕은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삼각관계나, 기타 등등도 다 마찬가지다. 척도를 바꾸면 얼마든지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주어진 통념에 끼워 맞추다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랑은 그야말로 '눈물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설령 아무런 장애 없이 결혼에 골인하게 된면 만사 오케이인가? 천만에! 오히려 가족관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첩첩산중, 점입가경이다. 그러니 중년 유부남, 유부녀들이 또 다시 이성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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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랑은 그 자체로 죽복이다. 헌신이니 배신이니, 복수나 애증 따위의 비루한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거기에는 "위반도 없고 별도의 처벌도 없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인 셈이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그렇다! 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꾸로, 지혜를 갈고 닦는 데 있어 사랑보다 더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