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4일 금요일

사무엘 베케트 : krapp's last tape



#Krapp's Last Tape
베케트 작품들 중 유일한 1인극이며, 주인공 크랩이 30년 전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테잎을 재생함으로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기억과 현재심리의 불일치에서 오는 심한 당혹감을 어찌할 바 모르는 크랩. 목청을 가다듬고 크랩은 마지막이 될 테잎을 녹음한다. 결국 그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크랩의 이 마지막 테잎의 마지막 구절만은 그의 남은 생과 일치하게 되리라.
"내 생애의 가장 좋은 날들은 지나가버린 것 같다. 행복해질 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시절이 다시 왔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겠다. 지금 내게 그때의 그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님에랴.
그렇다, 나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
(크랩은 꼼짝도 않은 채 앞쪽을 응시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테이프만 돌아가고 있다.)

#<침묵과 소리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中에서 - 권혜경 지음, 도서출판 동인
제2장 기억과 글쓰기
1.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 말의 기록과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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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랩은 말의 기록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정리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역으로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말의 헛된 반복(futile repetition)을 듣는 크랩의 심정은 곧
"모든 언어는 언어의 과잉이다. (all language is an excess of language, Beckett 1983 107)"
이라고 말한 모란(Moran)의 인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인식에 도달한 크랩의 귀착지가 침묵임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침묵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강박적인 이상에 희생당한 삶의 실패자로서의 크랩이 아니라, 삶의 덧없음과 말의 헛됨을 인식한 투명한 응시(staring)의 소유자로서 크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그가 마지막 부분에 녹음하는 테이프는 아마 그의 마지막 테이프가 될지도 모른다. 유한한 인간의 삶, 즉 시간과의 속절없는 싸움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말로써 기록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그토록 집착했었던 "껍질에서 알맹이를 골라내기"에 부합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인생 중 의미깊다고 생각되는 항목들을 기록해두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침식당한 크랩의 기억력은 그가 생각한 원래의 의도를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유한함을 더욱 더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히려 노년의 크랩을 보다 사로잡는 것은 '껍질'에 불과했던 주변부 기억들이며, 그는 젊은 시절에 갖지 못했던 통찰력으로 알맹이와 껍질, 중심의 기억과 주변부의 기억드을 모두 아우르는 확대된 인식의 폭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헛된 반복"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여전히 그의 기억과 말하기, 곧 글쓰기인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목소리를 기록하고 또 과거의 목소리를 취사선택하여 재생함으로써 편집자, 더 나아가 작가의 기능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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