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일 금요일

호모 쿵푸스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p.112-116 / p.161-162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의 주기가 짧은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내안에 사랑을 지속할 힘과 에너지가 충만하지 않으면 대상에 상관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게 연애다. 또 설령 외모가 출중하여 많은 상대로부터 애정공세를 받는다 한들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와 대상의 삶을 파괴하거나 갉아먹어 버리기 십상이다. 권태 아니면 변태 - 이게 근대인이 통상적으로 밟아가는 '연애의 정석' 이다. 이 두 개의 '뻔한' 코스를 벗어나 나만의 특이하고 강렬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면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랑 따위는 없다. 그러니 운명적 사랑을 하고 싶다면, 내가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어줄 만한 능력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그걸 터득하는 길은? 오로지 독서 밖에 없다!

그에 대한 명박한 증거가 바로 '대장금'의 사랑법이다. 잘 알다시피, 영화건 드라마건 대중가요건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주 테마는 연애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랑의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바로 죽음이다. 즉 사랑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한다. 운명적 만남, 불치병, 아니면 불의의 사고. 이런 것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에로스는 타나토스(죽음본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장금의 사랑이 흥미로운 건 이런 식의 공식구를 간단히 해체해버렸다는 데 있다. 그녀의 사랑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분명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장금이의 사랑은 자신들뿐 아니라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살린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길 위에 있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장금이는 아주 일찍부터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 때문에 무얼 못 해본적이 없다. 멜로물들을 볼 때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재벌총수건, 고시생이건, 직업여성이건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일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 남는다. 다시 말해 사랑이 삶을 '몽땅 먹어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삶이 사라진 자리를 사랑이 메웠는데, 사랑은 무상하게 변해간다. 그 무상함을 '불멸의 가치'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연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면 둘 다 죽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지만, 장금이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궁중에서건 유배지에서건, 수라간에서건 내의원에서건 그녀는 늘 뭔가를 배우고 터득해 나간다. 종사관 나리와 친해진 것도 장서각에 있는 책을 빌리는 과정에서다. 책을 사랑하는 장금이, 종사관 나리가 그녀에게 빠진 것도 그때문이다. 책을 읽는 모습, 늘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그녀의 표정이 종사관 나리를 매료시킨 것이다. 또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을 만나고,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말하자면, 그녀는 늘 어디에서건 앎의 코뮌에 접속한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늘 그것들과 함께 간다. 하여, 그녀의 삶이 달라지는 만큼 사랑도 변해간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연인에 대한 사랑은 다른 것들에 비해 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최종심급이 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삶의 모든 과정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함께 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존재론적 표현인 것이다. 이름하여, '걸으면서 사랑하기!'

이런 사랑법에는 실패가 없다. 짝사랑으로 끝나건 실연을 당하건 사랑이란 그 자체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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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랑도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조건이나 상황이, 혹은 나아가 운명이 두 사람의 결합을 방해한다 해도 사랑 자체가 주는 행복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왜냐면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건 그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판단의 기준을 바꾼다면 얼마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짝사랑이 왜 꼭 슬프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하기에 따라선 시간과 힘은 덜 들이고, 신체적 활력과 삶의 의욕은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삼각관계나, 기타 등등도 다 마찬가지다. 척도를 바꾸면 얼마든지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주어진 통념에 끼워 맞추다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랑은 그야말로 '눈물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설령 아무런 장애 없이 결혼에 골인하게 된면 만사 오케이인가? 천만에! 오히려 가족관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첩첩산중, 점입가경이다. 그러니 중년 유부남, 유부녀들이 또 다시 이성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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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랑은 그 자체로 죽복이다. 헌신이니 배신이니, 복수나 애증 따위의 비루한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거기에는 "위반도 없고 별도의 처벌도 없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인 셈이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그렇다! 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꾸로, 지혜를 갈고 닦는 데 있어 사랑보다 더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댓글 1개:

  1. 퍼갈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시급하다



    나 내일 합주하러 하자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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