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0일 일요일

학생과 직장인의 사이에서

지난 한달간 몸과 맘이 힘들었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년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 불가피했는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에세이를 쓰기 바로 직전 나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진행되는 공연에서 느껴지는 무감각함. 어디가 사회적(?)기업인 것인지에 대한 불신.
에세이를 쓰면서는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히옥스는 우리팀이 어떤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셨다.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그 고민을 돌파할 학습을 어떻게 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하셨다.
맞는 말이다.

더더욱 내가 더 신경써야할 문제.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지금도 누군가는 하고 있을 일들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거나
일을 지시하거나 일감을 나눠주는 일은 하지마라.
대신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라.

생텍쥐베리

네트워크컴퍼니

예전에 한 VC 파트너 아저씨가 (약간은 공격조로) 이런 질문을 했다. "세계 어느나라에 네트워크컴퍼니로 성공한 회사가 있는가? 모두들 그런 방법이 안되니까 일반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인데, 네트워크컴퍼니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Virtual company라든가, Digital Nomad라든가 하는 유사한 개념들이 간혹 소개되고는 했지만, 그 아저씨 말마따나, 꽤 성공한/규모있는 회사 중에서 실제로 네트워크컴퍼니로 계속 운영되는 형태는 발견하지 못했다. 어제 'Wordpress'의 창업자 인터뷰를 읽기 전까진. (물론 워드프레스도 아직 크게 성공한 회사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Here is the link - http://www.inc.com/magazine/20090601/the-way-i-work-matt-mullenweg.html

워낙 흥미로운 내용이라 발췌요약 해보자면..

워드프레스 창업자인 Matt Mullenwag는 고딩때부터 집에서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12M의 블로그를 가진 워드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세계각국에서 일하는 파트너들을 만나러) 출장을 가거나 집에서 일한다. 집 근처에 사무실이 있긴 하지만 1주일에 한번 사무실이 잘 있나 가서 보거나, 2달에 한번 있는 투자자들과의 이사회 미팅을 하기 위해 간다. 사무실을 마련한 이유는, 외부 사람들과 조용히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빌리기만 할 수 없어서이다. 전체 40명 정도가 풀타임으로 일하고, 그 중 8명은 사무실이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에 살지만, 아무도 사무실에 나오지 않고 자기가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한다.

내부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P2라는 툴을 사용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코드를 주고 받는다. 말이 필요할땐 스카이프를 사용한다.

팀원들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데, 나의 채용전략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모니터링 하지도 않고 간섭도 하지 않는다. 매니저 역할을 하는 사람도 없다. (서로 결과물로만 말한다) 직원의 대부분은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해봤던 사람들이다. 오픈소스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하루에 8시간을 일한 후에도 재미와 보람을 위해 기꺼이 프로젝트를 참여했던 사람들임을 의미하므로, 그들은 이제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원과 처음에는 계약직으로 관계를 형성한다.

창업은 내가 했지만,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CEO는 따로 있고, 우리는 4시간 동안 점심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최대한 자주 만나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려 노력하는데 작년에는 약 2천~3천명의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저녁에는 약속 등을 만들어 사람들을 만나고, 2-3시에 집에 들어오면 다시 일을 한다. (사무실에 출근할 필요가 없는 대신 시도 때도 없이 일한다) 팀원들이 세계각국에 흩어져있으므로 커뮤니케이션도 시도때도 없이 해야 하고, 그래서 특별히 자는 시간을 두지 않고 졸릴때 잔다.

20대때나 할 수 있는, 작은 회사만 할 수 있는, 서양회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인터넷 회사만 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면, 당신의 생각은 늙은 생각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공장을 가진 제조업이 이런 방법을 지금 당장, 우리나라에서 도입할 순 없겠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이런 흐름/방법이 무시못할 트렌드가 될지도 모른다.

인터뷰 형식의 이야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네트워크컴퍼니 시스템이 가진 여러가지 풀어야 할/고민해야 할 이슈들에 대해선 기사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비슷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외로움(?)이 없어진 듯 하다.


출처 : http://www.iankwon.com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무제

안그래도맘이이상하던참이었다.김대중전대통령의서거소식은작년이맘때쯤그녀의백일제향기를다시불러일으켰다.
공연을두탕뛰고사무실로들어오니팀원들이나에게그의소식을묻는다.
연락도안되고출근도안된단다.
핸드폰으로전화를해봤다.몇번신호가가다가꺼진다.
가슴이철렁했다.뭔가이상하다고생각했다.
집으로전화했다.조급함이느껴졌다.
그의엄마가전화를받았다.
얼떨결에안무도묻지못하고대뜸물었다.
 종희오빠어디있어요?
 죽었어.



으아아

모든것이아득해졌다.난정말너가죽었다고생각했다.오늘은웬지그럴만한날이라는기분이들었다.
역시아까부터기분이이상했던건이때문이었을거야.
작년그녀를떠올리며고통스러워했던것처럼마지막으로너가지었을표정이이미지화되었다.
저기저기저기깊은곳에서
까맣게알갱이처럼남아울던카나리아가부풀어올라터져나왔다.

나는정말아무생각이들지않았다.그냥울었다.너무절박했다.
터져나오는울음때문에낑낑거리며
 거짓말이죠? 어머니? 거짓말하지마세요.
 진짜야. 그새끼죽었어.

세번을물은뒤에야 그놈죽을만큼아파 라는 말을들었지만그럼에도나는안심할수없었다.진짜죽으면어떻해라는생각.병원에너가깁스를하고누워있는것은아닌지,너가암에걸린것인지,너가어디서떨어진것인지.

나정말앞뒤없이사람들다보는데엉엉울었어.부끄럽다고생각할수도없었다.내몸의눈과귀만감지되었다.귀에서는자꾸너의목소리가맴돌고눈에서는자꾸닭똥같은눈물이나왔다.
얼마뒤에그나마어디가죽을정도의일은아니라는것을알게되었지만나에게는-특히나내안의카나리아에게는-굉장히충격적이었나보다.그전화후삼십분을내리울었다.
머리로는네가죽지않은줄알고있었지만울음을멈출수없었다.울면서도나의카나리아가결코작지않은것에놀랐다.너를만난것이오년전.우리헤어진지삼년.사실머릿속으로나는지금의너를사랑하는것이아니라옛날의너를사랑하는것임을알고있었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역시나아직도나는옛날의너를또한그러하니지금의너도아끼고사랑하나보다.

아.이렇게커져버린카나리아를맘저구석으로밀어넣느니그냥날려보내고싶다.
또얼마의낮과밤을보내야할까.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나, 탕기, 캥거루족 = 88만원 세대의 독립


캥거루족에 관한 위트있는 프랑스 영화 "탕기"



나는 월급을 받는다. 지난 6월부터.
액수는 한달에 약 70만원 정도 (원래는 83만원 세금 떼고 73만원)

"엄마 생일선물에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요?) 하고 분홍신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뭐긴 뭐야, 경제적으로 독립해야지~ 너 그 월급받고 뭐에써. 흥청망청 쓰지마!"
라는 소리를 대뜸 들었다.

처음 드는 감정. 솔직하게 말하자면
'뭘 알고 저러는 걸까?'

화가 났다.
.
.
.
.

내가 사는 월세집은 보증금 500에 월세 35만원이다.
밤비와 나누어 내면 각각 식비(쌀, 계란, 야채, 우유, 두부 등), 관리비, 전기세, 물세, 가스세, 생활필수품 포함
40만원씩 내고 있다.

거기에 전화비나 인터넷비, 유흥비, 문화생활비 등은 제외되어있다.
전화비 약 4만원
인터넷 2만 5천원
유흥비 + 문화생활비(옷값 포함) 10만원
외부식비 3만원
교통비 3만원
영어학원 25만원
하면 벌써 87만원이다.

내가 월급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돈의 한계를 넘어버린다.
거기에 급작스럽게 쓰이는 병원비 혹은 사고비 등을 생각하면 여윳돈을 생각해놔야 하고 저금해야할 돈도 있다.
88만원세대, 88만원세대 하지만 정말 88만원세대로 내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학원을 다니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다.
물론 각오하면 그렇게 살 수 있기는 하다.

정말 아끼고 아껴 사람 만나지 않고, 옷사지 않고, 영어수업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나는 고립되어 버린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유지하는데도 돈이 든다. 커피값만 5000원이다.
옷을 사지마 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내가 꾸질꾸질하게 입고다니면 이미지 관리를 요구한다.
취업하려해도 기본이 토플, 토익에 자격증, 대학, 내가 어느 대회에서 입상했는가를 요구한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뿅하고 만들어낼 수가 없다.
사회에서는 어느정도의 스펙을 요구하고 그것에 따르려면 또 내가 얼마만큼의 값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돈을 써야 한다.

이 상황에서 독립하라니.
말이 되는 소린가? 싶다 (차라리 밥이라도 한번 사주시면서 말씀하시던가.)

내가 일주일 동안 영어수업을 받고 영어공부를 하는 것과 시급 4500원을 받으면서 알바를 하며
독립을 하는 것중 무엇이 나에게 보탬이 되냐 물으면
나는 당연히 영어수업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내가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지만...)

영화 안의 탕기는 심리적으로 부모님에게 독립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구조적으로 독립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저런 한심하단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억울하다.

창의서밋에서
부모님이 없어져버린 청소년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 이런 주제를 갖고 창안대회를 가졌는데
1등의 작품 제목이 "나는 혼자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보면서 생각했다. 가짜다.

나는 혼자다.
아무런 베이스 없이 사회에 뛰어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아무런 안전망도 없다.
아니 안전망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것또한 최소한에 최저의 질이다.
실제로 혼자 자립하면서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처절하다.
그 친구는 먹고사는 것에 허덕인다. 대학갈 돈도 없다.
우리 회사에 있는 대학교 4학년 친구는 학자금만 1500만원이란다.
홍대 법대에 다니는 한 형은 학자금만 2000. 그는 자신이 변호사가 되면 가볍게 값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많은 20대들이 졸업하기 전 빚부터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30, 40대들은 20대들의 상황을 너무 모른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돈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이미지, 개인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추락시켜버린다.
사람못만나고 자기 이미지 연출못하고 자기개발못하고.
한마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다.

오기만으로 되는 시대도 끝났고
호기만으로 되는 것도 어느정도의 기본 바탕이 된 사람만 가능하다.
요행도 없고 나의 모든 가치는 서류로 정리 가능하다.
아니면 빽이 있던가, 연줄이 있던가. 천재던가.

대부분의 똑똑한 친구들은 그걸 다 알아버렸다.
그래서 자기개발, 자기 스펙에 힘쓴다.

뭔일이 터져도 80년대의 그 때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순간 자신의 미래를 포기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구 잘못인가? 를 따지면 안되는 문제지만
이게 우리 20대에게 따져서 될 문제인가?
개인에게 독립하라고 한심하듯 이야기하면 풀리는 문제인가?

우석훈 박사님은 20대들이 토플책을 버리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던지라 하지만
과연 그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과연. 우석훈도 프랑스유학 다녀오신 '박사'님인데...)

점점 더 상황은 안좋아지고 있다.
비정규직을 향한 대우는 좋아질 기미가 없고
사람은 여전히 연줄과 대학, 점수로 그의 질이 결정된다.
일할 곳은 점점 없어져가고
(어떤 미친 네티즌은 공장가서 일해도 돈받겠다고 하는데 씨발 개새꺄 너가 거기가서 일해봐)
하고싶은 것 하면서 먹고살기도 점점 힘들어진다.

때문에 하자도, 정부도, 세계도 창의에 눈길을 돌리는 듯 하다.
창의적인 일자리, 창의적인 생각, 창의적인 상상이 지금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사실 조금 막연하긴 하지만 ㅎㅎㅎㅎㅎㅎㅎ)

하지만 나는 그것도 그렇지만.
정부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기성세대들이) 사회적약자와 20대들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십대들의 목소리도 좀 더 커져야한다.
사실 사회가 바뀌기는 힘들고 기성세대가 갑자기 변하는 것은 매직같은 일이다.
더이상 기성세대들의 -무한경쟁과 물질주의-틀에 갇혀 사는 것은 거부하면 안될까?
돈보다는 서로가
점수보다는 상상이
노동보다는 놀이가 대우받으면 안되는 것인가?

젊은 피로 재밌고 즐겁고 위트있고 빈틈을 노리는 일들을 하자.
궁핍하게 사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되 궁핍으로 세련됨을 노리자.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다.

나부터 그러자...
응 ㅠㅠㅠㅠ


졸린김에 끄적여봤다...일어나서 다듬어야지...

아버지

 안녕하세요. 아빠. 초등학교 때 종이 카네이션을 접어 썼던 편지를 생각하면 꽤 오랫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쓰네요. 하지만 이것을 당신이 읽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조금 후련하게 편지를 쓰렵니다.

 근 몇년간 당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 4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요즘 엄마의 손을 보며 그리고 가끔씩 나에게만 내비치는 그녀의 어리광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드셨겠죠.

 지영이의 졸업식 때 사진으로나마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진에 있는 지영이의 얼굴을 보며 실실거리다가 한장의 사진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그리고 숨이 찼습니다. 통통해진 얼굴, 이마의 주름, 약간 쳐진 볼, 쑥쓰러움이 묻어있는 희미한 미소. 눈을 땔 수가 없었어요. 이게 뭔가 싶었거든요. 아빠도-당신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했나 봅니다. 그리고 나한테 아빠가 있었던 것을 다시 알 수 있었습니다.

 난 이따금 죄책감이 듭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살지 못하는 나의 막내동생 현확이 때문입니다. 종종 어두운 밤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될 때면 저는 가슴을 치며 웁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애교부리고 싶고 애정을 받고 싶습니다. 나조차 이런데 어린 그애는 이 어둠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됩니다. 그럴 때면 온갖 상상을 하곤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10년 뒤 스무살이 된 그 아이가 날 찾아와 "왜 날 버렸어?" "왜 그 때 그냥 갔어?" 라고 묻는 상상입니다. 나를 미워할지, 그 때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줘야할지, 그 아이는 어떻게 클지 두렵습니다. 그냥 내가 현확이와 같이 살까? 생각하지만 아직 내 삶을 지탱하지 못하는 저보다는 당신이 좀 더 그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겠죠.

 생각해보면 제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접어들던 시절부터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나싶어요.  확실한 시발점은 잘 모르겠지만 여러 사건들이 기억납니다.

당시 나는 내 마음 속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당신은  내 삶을, 우리 가족을 맘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지배자 같았습니다.
엄마 또한 당신의 부인이었던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의 삶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당신 또한 항상 가장으로만, 남편으로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신현균으로써의 삶도 있지 않나요? 엄마는 일을 하고 싶어했고 사회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하셨죠. 그럼 그런 점을 당신이 인정해주고 배려해주셨어야 합니다. 나를 키우면서 주부 우울증도 잇으셨다고 고백하셨는데 당신은 모르셨나요?
또한 너무 많은 것을 바렜던 것도 문제입니다. 커리어우먼이면서 세 아이의 엄마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하지만 나는 엄마가 직장에 나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왜냐면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컵에 있는 맥주를 나에게 뿌리고 골프채로 내 귀를 치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지요?
그 때의 아찔했던 감정들, 상황을 나는 감정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근육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답답해하고 울고 미워하고 반항하고 그 때의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내 지갑에 당신의 증명사진을 칼로 찢어서 갖고 다녔구요.
가족사진에 보이지 않게 당신의 얼굴에 칼로 흠집을 냈죠.

당신의 신발을 숨겼던 사건이 기억나시나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그랬다고 아셨었죠.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 정말 당신이 싫어서 갔다 버린 것이었어요.

아는 형에게 나는 아빠를 죽일거야 라고 선전포고를 하고는 했어요.

매일 음식을 만들 때면 락스를 넣어 당신을 죽일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총. 총이 있으면 당신의 머리, 관자노리를 총 끝에 갖다대어 죽이는 상상을 했죠. 속으로 쾌감을 맛보면서요.

엄마와의 이혼재판이 오고갈 때 내가 증언을 한 부분이 있으니 그 때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이 아이는 어릴 때 강간을 당해 아빠는 물론 모든 남자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구요.
세상에. 난 당신을 아빠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쓰레기.

저번에 사주를 봤는데 제 사주에 아비 부자가 없더군요. 재미난 일이지만 그것은 사주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라는 아빠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가합니다. 나는 아버지 라는 위치의 강압적인 모습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내 안에서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만,
그건 아마 내가 아이에서 소녀가,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맘 속 깊은 아이 신지예는 당신을 아직도 무서워하고 미워하고
그 아이를 마주볼 때면 나는 눈물부터 차오르고 숨고 싶어요.

그 때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내가 계속 아이였다면 나는 계속 울고 살았을 것입니다.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물론 계속 엄마와 나, 지영이와 현확이가 뿔뿔히 흩어진 것에 대해, 나의 동생들이 가족사랑 하나 받지 못하며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도 노년이 되면 쓸쓸히 살아가겠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소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이 편지를 당신이 아닌 현확이와 지영이에게 보낼 생각입니다. 물론 당신에게는 보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이편지를 보면 아마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싫어요. 그리고 이미 노쇠해진 당신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무의미하잖아요?

그 때가 되면 나는 나대로 나의 동생들에게 용서를 빌 생각합니다. 동생들이 나를 이해해줄까요? 아, 아버지 그런 점에서 나는 또 당신이 되어버리는군요. 또 슬퍼집니다.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ㅈㅅㅇㅂㅇㄴ

오늘 너무 서러워서 .... (사실 누구한테 당한것도 아니다만은)
저녁도 안되어 당산역에서 엉엉 울었다.
오널은정말재수옴붙은날이었다.

사건은 내가 전 글에 올렸듯 노트북 어뎁터를 가져오지 않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 월요일 오후까지 보내야하는  공모전 서류가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 엄청나게 큰 켄트지에 그리는 그림을 여섯장이나 그려야했다. (아니 이사람들도 웃기지 어떻게 저 그림을 이틀안에 그려 나보고 말라죽으란소린가)

2. 탐탐 도착, 얏호. 졸리지 앉게 에스프레소 더블이요!

3. 자리에 앉아 맥북을 켜니 어댑터가 없었다.. 좌절
남은 뱃더리 용랑 6분...... OMG

4. 탐탐에 있으면서 할 것이 없었던 나는 다른 이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죽치고 앉아있었다. 그 새벽 버스도, 지하철도 자전거도 없는 내가 어디에 갈 수는 없으니까....

5.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6. 멍때리며 앉아있었다. 휴지접기, 종이접기를 했다.

7. 강산이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아프단다...

8. 은정이에게 연락이 없다.. 왜지... 아잉아잉 거리면서 문자 4통, 전화 2통을 보내자 그제야 답장이 왔다. 연락오는지 몰랐단다.
난 탐탐에서 한시간 죽쳤다.

9. 은정이가 라면먹고 있으니 자기네 집으로 오란다. 당시 새벽 3시쯤. 뭔놈의 라면이여 생각했지만 갈 곳이 없어 발길을 돌렸다.

10. 가는 길에 태랑한테서 아저씨 뽕빨느끼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우리집 올래?" "어딘데?" "이대" "안가" 쏘쿨하게 끊었다.

10-1 가는 길에 토밟았다. 주황색 토. 이상한거. 끈적끈적 푸르딩딩한거...
신발에서 냄새났다.
밑창이 주황색이 됐다. 씨발

11. 은정이네 집에 도착하니 원영이와 은정이와 티아와 티코가 나를 반겼다. 역시나 소주에 라면먹고 있었다.

12. 조금 특이했던 점은 2PM 영상을 보고 있었단 점이었다 이 불굴의 아가씨들은 장장 여섯시간 내리 2PM의 뮤직비디오, 버라이어티쇼를 돌려봤다. (대단해)

13. 왕소심 나는 "너는 2PM 오덕질을 할 동안 나는 일을 할테니 네 어뎁터를 빌려줘! 이은정!"
할 수 없었다. 결국 잠이라도 청하려 했으나 고양이 알레르기 발동
엣치 엣치
콧물 줄줄
뾰로지 뽀록

14. 그렇게 밤 새고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8시 하자 도착. 나에게 있는 건 6장의 종이와 아크릴물감(헐. 수채화물감도 아니고, 포스터 물감도 아니고.. 아크릴이라니....)

15. 난 아크릴 잘 모른다. 하지만 해봐따..
오후 12시가 되도록 한장을 못끝냈다.
욕해도 되나? (조때따....)

16. 12시 30분경 너무 졸려 잠이 들었지만 내 머리위를 돌아다니는 희끄무르죽죽한 5장의 종이환영 때문에 50분에 일어났다.

17. 그 때쯤 도착한 조정자팀. 오묘여신님이 나에게 과자와 우유를 하사해주셨다. 우적우적

18. 포스터 물감을 찾아 하자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
운영지원부 -> 없는데...
디자인실 -> 없는데.. 104호 한번 가봐요.
변 -> 하자에 물감많았는데...

결국 내가 창고 들어가서 104호 뒤져서 아이들방 문따고 들어가서 책상뒤져서 물감겟.

19. 종이가 모자르다는 것을 깨닳았다.
자전거 타고 10분거리 모닝글로리에 가서 종이 6장 삼.

20. 6장의 그림 중에 6번째 그림 완성
1번째 그림 80% 완성

나머지..... 희끄무루죽죽

21. 어라 4시네? 강남에서 5시에 영어 수업이 있어 얼렁 치우고 집에 잠깐 들렀다.

22. 집 앞에서 옆집 할머니 난리.
그 이유. 룸메가 어제 새벽 3시에 문을 두들겨서 시끄러웠다.
이 때 감정상태가 너무 메롱이라 무시

23. 옷갈아입고 집에서 나오는데
옆집 할머니 윗집 아줌마에게 한풀이 시작.
나 감정폭발해서 싸우기 시작.
할머니 사람잡는다며 쩌렁쩌렁하게 말 (목소리 큰게 다가 아니라구요)
결국 우리집 스토커 이야기도 나옴

24. 대충 수습하고 자전거 타고 당산역까지 감. 이때 시간 4시 40분. (다섯시 강남인데...)

25. 당산역에서 자전거를 놓고 가려고 하는데 자물쇠번호를 까먹었다.
5220인가... 5240... 인가..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음...
결국 자전거 방치..

26. 당산역 도착. 서러워서 눈물 뚝뚝
강산에게 전화해니 흐엉엉

27. 지하철왔네.. 이래저래타야지. 하면서 탔는데 반대편 노선...

28. 합정에서 내리려는데 문앞에서 물건 떨어뜨림... 내 뒤 남자 놀라 흠칫하셨어요... 죄송해요..

29. 전철 갈아타고 강남으로 고고.

30. 강남 도착. 한시간 지각 그런데 장소가 어딘지 모름.

31. 수업받고 있는 수지에게 전화해 장소 알아냄.

32. 너무 따뜻하게 나를 반겨주는 MJ.  덕분에 맘이 좀 좋아졌다.

33.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수지가 자기가 종로에서 알게된 외국인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MJ와 나는 극구 말렸지만 수지는 맘이 변하지 않음.

34. 결국 종로행.

35. 만나고 보니 외국인 훈남에 착했음. 그리 어두침침하지도 않았다.
이름뭐? 압델? + 수지 쌍쌍으로 만나 데이트 분위기에 내가 없는편이 나을 듯 싶어 몇마디 나누다가 먼저 간다고 이야기했다.

36. 하지만 셋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상태. 쏘쿨한척하려고 안녕!!!!!! 하며 엄청 뛰었다. 그들이 날 볼 수 없을 때까지...

37. 근데 나 길잃음.

38. 여가 어디가..

39. 빙빙 돌아다니다가 어떤 아저씨를 통해 내가 종로역에서 완전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닳음

40. 하지만 아직도 내가 어딘지 모르겠음. 1시간 가량 해맴.

41. 다행히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기다리다 보니 271 도착!!!!!!... 인줄 알앗는데 다음 정류장에서 서더라.

41-1. 271타고 홍대 도착. 홍대에서 5714타고 당산 도착. 당산에 무사히 있는 나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헐래벌떡 달려옴.  오늘이 서류 마감이니까 12시까지만 보내면 될꺼야!!!

42. 생각하며 팜플렛을 보니 오늘 오후 6시까지더라.

43. 결국 인생 무상이다.

오늘의 성과물
그림 2장.
1시간 늦은 영어 수업.
토묻은 신발밑창.

바보다

나 바보다
나 바보야
크헝헝헝

노트북 어뎁터를 안가져왔다.
이제 알아버렸어.... ㅠㅍㅠ

밧데리 6분남은 시점...

나 이제 뭐하지?

버스도 업ㅂ으니 영락없이 탐탐에 갇히게 생겼다...
뿡도 샛별도 연락안돼 킇엏엏엏ㅇ헝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크헝헝헝헝헝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엉ㅇ엉엉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
어엉어엉엉 어무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느님부처님알라신
시간을 돌려주어요..
킇으헝헝헝헝

2009년 8월 8일 토요일

AntiVJ

송도 미디어 아트쇼에 생이 초대되어 덤으로 끼어 가게 되었다.
말로만 스리슬쩍 듣던
AntiVJ 를 보게 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온 3D, 2D, 건축 아티스트로 구성된 팀이다.

이들이 사용한 프로젝터는 Barco XLM H25 기종 두대이며 각 28000 Ansi lumen의 밝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대당 가격
은 $138,745.00(약 1억 7천만원)...

삼치 왈 "이런거 돈있으니 하는거지...."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정신없다

정신없다.
사이버망명한답시고 뭔가를 끄적이긴했는데 뭔가이렇다할것은아니다.

h. 는 IDEC때문에 정신없으시다.
끝이 약 한달 남은 시점에
아무것도 한것이 없다. -난 아마 죽겠지요.-

에세이
콜로키엄준비
초대장
포스터

이야기꾼은 또 이야기꾼대로 스케줄을 맞혀가야 한다.
-훨훨 난다. 8월 중순 쇼케이스
-여우와 전화박스 생과 즉흥연습
-세가지 질문 10월까지 개인작품 하나 만들어보자.
-청소년 관련 연극 12월
-워크숍북 제작

6월에 신나게 놀아재낀 벌을 7,8,9월에 받고있다.
역시 놀면 안돼.....OTL


아이고,
너를 보러 가고싶다.
금산!!!가고 싶다!!!!!!!!!

2009년 8월 5일 수요일

똘스또이의 편지

“당신의 두 작품은 모두 동시대의 문제에 관해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방자치회의 문제점들, 문학작품의 경향성 그리고 여성의 해방 등을 논쟁적 필치를 통해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 세계에서는 그런 문제들에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그 어디에도 그런 문제들이 자리 잡을 공간이 결코 없습니다. 여성의 해방이나 문학적 파당성에 관한 문제는 당신이 속해 있는 뻬쩨르부르그 문학계에서는 분명히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문제들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 작은 진흙탕 구덩이의 한복판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빠져있는 그 구덩이를 넓은 바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사회적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 수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 것입니다. 예술가의 목표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술가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수많은 양상들을 펼쳐내는 삶 그 자체를 사랑할 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 정확한 해결의 관점을 논박의 여지없이 정립할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격려를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런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단 두 시간도 허비하지 않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쓸 작품이 20년이나 지난 다음에 이제 겨우 어린아이에 불과한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것인데, 그들이 그 작품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삶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내 온 삶과 모든 열정을 그런 작품의 창작을 위해 쏟아 부을 것입니다.”

- 동시대 작가 뾰뜨르 보보리낀에게 보낸 똘스또이의 편지(1860?-)

2009년 8월 1일 토요일

나한테하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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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이야기 관객과의 대화

왜 이 연극은 대사가 없나요?

대사가 사실은 있는데 귀로만 들리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대사가 다 있다. 저희 공연이 마임공연이 아니냐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우리가 삶을 살면서 여러가지 순간이 있는데 모든 관계가 말로서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장면 자체가 말이 없는 어떤 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인형에 대해서..
여기 나오는 달래 인형은 관절인형이라고 하고 안에는 스폰지다. 다른 여러가지 관절재료를 사용하여 관절을 만들었다. 달래 얼굴 안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이중 얼굴이다.
오늘 나온 달래는 다섯번째 여섯번째 달래. 제작기간은 육개월정도.

이 극의 원작은?
대표가 쓴 것이다. 혼자 북치고

장면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꼭 6.25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소재로 한 가족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바위가 돼지 같이 생겼어요..

언제부터 인형을 좋아하셨어요>
인형극 시작한지는 20년 정도....
인형을 좋아하는 건 아마 사물을 식별할 때부터 아니였나.
인형 싫어하는 사람 없지 않나요...

동성결혼 다음 인권패러다임은 다자간(多者間) 사랑 ‘폴리아모리 부부’



미국내 동성결혼을 허가하는 주들이 늘어나며 남녀의 일대일 결합이 아닌 결혼의 양태들이 속속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인간의 일생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을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의 결혼 양태가 올바르게 인식되고 정정당당히 인정받는 것을 자신들의 권리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 ABC 인터넷판은 그중 하나인 폴리아모리(Polyamory)에 대해 18일 특집기사를 게시했다. 다자간 사랑을 표방하는 폴리아모리가 동성결혼에 대한 운동 다음의 인권 패러다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폴리아모리를 표방하는 이들은 상대방을 독점하지 않고 다자간에 사랑을 나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룹으로 활동하며 해당 그룹 안에서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함께 아이를 기르기도 한다. 폴리아모리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여러 파트너와의 다양한 관계로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폴리아모리스트들은 "타인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한 사람은 사랑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권리는 결혼을 그룹으로 인정해달라는 것. 더 이상 가족을 '부부와 그들의 자녀'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이들과 같은 공동체 생활도 '결혼 생활'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가 논란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폴리아모리스트인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러브(Love, 51)는 "미국 내 6개 주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다. 이제는 폴리아모리 차례"라고 밝혔다.

폴리아모리 운동은 1960~70년대의 공동체 생활로부터 태동해 성장해왔다. 폴리아모리 그룹의 모임 중 하나인 '러브 모어'(Love More)는 1986년 설립돼 현재까지 3천여명의 회원이 실제 활동중이다. 전세계적으로는 1만5천여명이 회원목록에 올라있기도 하다. 폴리아모리 전문가 데보라 애너폴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공동체 형태"라며 "하와이에서는 부부 외 다른 파트너를 뜻하는 '푸날루아(punalua)'라는 단어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직 폴리아모리를 난잡한 행위, 죄악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그들의 모임이 성애적이라기 보다는 가족애적인 공동체문화의 하나라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Jaxitty'라는 아이디를 쓰는 미국의 네티즌은 "20대 시절 폴리아모리 그룹에 속해있었다"며 "우리 그룹은 공동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등 의외로 평범한 가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9명의 멤버 중 2커플이 있었고 이따금 파트너가 바뀌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며 "우리는 복잡하게 얽히기보다는 룸메이트같은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폴리아모리에 대한 오해에 대해 반박했다.

미국 보수단체들은 이들에 대해 동성 결혼 반대와 같은 선상에서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부부는 남녀간의 결합으로만 이뤄지며 이 부부로부터 가정이 형성된다는 보수적인 가족의 정의를 고집하고 있다.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최근의 잇단 동성 결혼 합법화가 결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열어놓은 꼴이라고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I'm listening

‘공정 커피’ 이어 ‘착한 패션’도 뜬다

‘공정 커피’ 이어 ‘착한 패션’도 뜬다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
‘공정 커피’ 이어 ‘착한 패션’도 뜬다
런던·파리·밀라노의 ‘윤리적 패션’ 국내도 열풍
  • 올해 초 런던 패션위크 개막식에서 영국의 대표적 소매점인 막스&스펜서, 테스코, 세인즈버리 등 300여곳이 ‘지속가능한 패션 행동계획’을 약속했다. 제3세계 어린이 노동을 착취하지 않은 공정무역 섬유, 환경을 지키기 위한 유기농 면의 사용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패션의 중심지인 런던·파리·밀라노 등지에서 ‘윤리적 패션’이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최근 국내에도 그 열풍이 불고 있다. 자신의 몸을 치장하기에 이기적인 소비 행위로 치부됐던 패션 분야에까지 ‘착한 소비’ 운동이 스며든 것이다. 윤리적 패션은 옷의 재료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느 지역에서 나왔는지, 공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 인류와 지구의 지속가능한 공존을 생각하는 옷 입기를 말한다. 주로 공정무역을 통해 생산되거나 친환경적인 소재와 방식으로 만든 옷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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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알루미늄 캔 뚜껑을 이용해 만든 아나 파울라 프라이타스의 공정무역 원피스.◇(오른쪽)신문지를 재활용해 만든 개리 하비의 드레스.
    #옷의 공정 과정까지 생각하는 패션

    경기도미술관에서 10월 4일까지 열리는 ‘패션의 윤리학-착하게 입자’ 전시회는 윤리적 패션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실험을 집약해 보여준다. 국내에서 간헐적으로 친환경 패션쇼가 열리긴 했지만 공정무역과 재활용 의상, 민속 의상 등 윤리적 범주로 묶을 수 있는 패션을 모두 아우른 전시회는 처음이다. 국내 디자이너 그룹과 해외 6개국의 디자이너, 건축가, 설치미술가, 사진작가 등 19팀이 참여한다. 황록주 큐레이터는 “윤리적 패션이라는 것은 옷을 입는 아주 기본적인 행위로 새로운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아나 파울라 프라이타스는 재활용 알루미늄 캔 뚜껑을 사용해 브라질의 지역공동체 여성들과 함께 엮어 드레스, 가방 등을 만들었다. 그의 작업에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페어트레이드코리아에서 운영하는 ‘그루’는 공정무역 의류와 액세서리 등 패션 소품을 만들어내는 공정무역 브랜드다. 그루의 대표 작가인 홍승완은 이번 전시회에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 등의 생산자와 직거래로 원단을 공급받아 만든 의상을 선보였다.

    영국의 마크 리우는 단순히 버려진 옷을 다시 입는 차원을 넘어서 제작단계부터 버려지는 옷감을 최소화하게 디자인했다. 일본의 기모노 등 원단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동양적 제작방식을 차용, 서구식 공정과정에서 15%가량 떨어져 나가는 옷감을 거의 없앴다.

    이 밖에 영국 디자이너 개리 하비는 버려진 신문지로 우아한 오뜨꾸뛰르 드레스를 제작했고, 홍콩의 모바나 첸은 문서 절삭기의 파지를 손뜨개질로 엮어 옷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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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까르뜨니트의 한지 니트 카디건. ◇(오른쪽)옥수수전분 등 친환경 소재로 만든 이경재의 웨딩드레스.
    #옥수수전분 웨딩드레스 등 윤리적 패션의 진화

    윤리적 패션의 초기 방향을 제시한 친환경·재활용 패션은 국내에서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쐐기풀, 한지, 옥수수전분 등을 이용한 천연섬유가 국내에서 일부 생산되고 있고 이를 이용한 옷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패션디자인 업체 ‘오르그닷’은 20∼30대 젊은이 10여명이 친환경·공정무역 제품의 생산과 유통을 돕기 위해 만든 곳이다. 이곳의 이경재 디자이너가 옥수수전분이나 쐐기풀, 유기농 면으로 만든 웨딩드레스는 폴리원단의 일반 웨딩드레스와 달리 폐기돼도 저절로 분해돼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제품 탄생 단계부터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면서 ‘에코 웨딩’이라는 문화적 이슈도 만들고 있다.

    니트 브랜드인 까르뜨니트도 환경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소재인 전통 한지로 만든 한지 니트 카디건과 재킷을 최근 선보였다. 전통 한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한지사 섬유를 사용했으며, 암모니아·포름알데히드 등과 같은 환경유해물질을 제거하는 소취기능도 있다.

    쌈지의 ‘착한 가게’는 작가들이 기계를 거치지 않고 수작업, 재활용, 리폼 등의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다. 자투리 가죽을 재활용해 지갑이나 가방, 구두를 만들거나 천연 염색을 한 넥타이와 스카프, 수제 가방 등을 만드는 등 제작 전 과정에서 환경을 생각한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백소용 기자 swini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