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5일 토요일

아버지

 안녕하세요. 아빠. 초등학교 때 종이 카네이션을 접어 썼던 편지를 생각하면 꽤 오랫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쓰네요. 하지만 이것을 당신이 읽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조금 후련하게 편지를 쓰렵니다.

 근 몇년간 당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 4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요즘 엄마의 손을 보며 그리고 가끔씩 나에게만 내비치는 그녀의 어리광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드셨겠죠.

 지영이의 졸업식 때 사진으로나마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진에 있는 지영이의 얼굴을 보며 실실거리다가 한장의 사진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그리고 숨이 찼습니다. 통통해진 얼굴, 이마의 주름, 약간 쳐진 볼, 쑥쓰러움이 묻어있는 희미한 미소. 눈을 땔 수가 없었어요. 이게 뭔가 싶었거든요. 아빠도-당신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했나 봅니다. 그리고 나한테 아빠가 있었던 것을 다시 알 수 있었습니다.

 난 이따금 죄책감이 듭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살지 못하는 나의 막내동생 현확이 때문입니다. 종종 어두운 밤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될 때면 저는 가슴을 치며 웁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애교부리고 싶고 애정을 받고 싶습니다. 나조차 이런데 어린 그애는 이 어둠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됩니다. 그럴 때면 온갖 상상을 하곤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10년 뒤 스무살이 된 그 아이가 날 찾아와 "왜 날 버렸어?" "왜 그 때 그냥 갔어?" 라고 묻는 상상입니다. 나를 미워할지, 그 때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줘야할지, 그 아이는 어떻게 클지 두렵습니다. 그냥 내가 현확이와 같이 살까? 생각하지만 아직 내 삶을 지탱하지 못하는 저보다는 당신이 좀 더 그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겠죠.

 생각해보면 제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접어들던 시절부터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나싶어요.  확실한 시발점은 잘 모르겠지만 여러 사건들이 기억납니다.

당시 나는 내 마음 속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당신은  내 삶을, 우리 가족을 맘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지배자 같았습니다.
엄마 또한 당신의 부인이었던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의 삶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당신 또한 항상 가장으로만, 남편으로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신현균으로써의 삶도 있지 않나요? 엄마는 일을 하고 싶어했고 사회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하셨죠. 그럼 그런 점을 당신이 인정해주고 배려해주셨어야 합니다. 나를 키우면서 주부 우울증도 잇으셨다고 고백하셨는데 당신은 모르셨나요?
또한 너무 많은 것을 바렜던 것도 문제입니다. 커리어우먼이면서 세 아이의 엄마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하지만 나는 엄마가 직장에 나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왜냐면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컵에 있는 맥주를 나에게 뿌리고 골프채로 내 귀를 치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지요?
그 때의 아찔했던 감정들, 상황을 나는 감정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근육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답답해하고 울고 미워하고 반항하고 그 때의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내 지갑에 당신의 증명사진을 칼로 찢어서 갖고 다녔구요.
가족사진에 보이지 않게 당신의 얼굴에 칼로 흠집을 냈죠.

당신의 신발을 숨겼던 사건이 기억나시나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그랬다고 아셨었죠.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 정말 당신이 싫어서 갔다 버린 것이었어요.

아는 형에게 나는 아빠를 죽일거야 라고 선전포고를 하고는 했어요.

매일 음식을 만들 때면 락스를 넣어 당신을 죽일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총. 총이 있으면 당신의 머리, 관자노리를 총 끝에 갖다대어 죽이는 상상을 했죠. 속으로 쾌감을 맛보면서요.

엄마와의 이혼재판이 오고갈 때 내가 증언을 한 부분이 있으니 그 때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이 아이는 어릴 때 강간을 당해 아빠는 물론 모든 남자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구요.
세상에. 난 당신을 아빠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쓰레기.

저번에 사주를 봤는데 제 사주에 아비 부자가 없더군요. 재미난 일이지만 그것은 사주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라는 아빠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가합니다. 나는 아버지 라는 위치의 강압적인 모습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내 안에서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만,
그건 아마 내가 아이에서 소녀가,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맘 속 깊은 아이 신지예는 당신을 아직도 무서워하고 미워하고
그 아이를 마주볼 때면 나는 눈물부터 차오르고 숨고 싶어요.

그 때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내가 계속 아이였다면 나는 계속 울고 살았을 것입니다.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물론 계속 엄마와 나, 지영이와 현확이가 뿔뿔히 흩어진 것에 대해, 나의 동생들이 가족사랑 하나 받지 못하며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도 노년이 되면 쓸쓸히 살아가겠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소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이 편지를 당신이 아닌 현확이와 지영이에게 보낼 생각입니다. 물론 당신에게는 보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이편지를 보면 아마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싫어요. 그리고 이미 노쇠해진 당신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무의미하잖아요?

그 때가 되면 나는 나대로 나의 동생들에게 용서를 빌 생각합니다. 동생들이 나를 이해해줄까요? 아, 아버지 그런 점에서 나는 또 당신이 되어버리는군요. 또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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