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경제학자 중에서 레이건이 미국을 바꾸기 전에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던 몇 십 년 동안 미국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쓴 <볼링 얼론(Bowling Alone)>이 있다. 그 책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부터 혼자서 볼링하는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의 원자화를 말한다. 케인스주의가 살아 있을 때였다. 복지가 사람 생활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관계다. 이런 인간관계를 사회자본이라고 부른다.
서울 인사동 어느 음식점에 갔더니 혼자 왔다고 밥을 팔지 않았다. 1인분은 안 된다고. 그래서 나왔는데, 겁이 나 아무 집에도 못 들어가겠더라. 그래서 광화문까지 걸어와 식당에 들어갔다. 네 사람이 앉는 자리에 이미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데 그 옆에 앉으라고 했다. 다른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진짜 걱정해야 할 건 바로 이런 상황이다. 사회적 자본, 인생살이의 근본이 되는 자본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의 고도성장 논리가 이를 망가뜨렸다. 필연적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인심이 좋아졌다? 이런 건 없다. 절대로 양립이 안 된다. 경제성장과 자본주의 논리가 인간과 인간, 개인과 개인을 무한경쟁 관계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물질이 풍부하면, 개인이 가진 것이 많으면 외할머니가 살던 마을과 같은 이웃 간 교류가 있을 수 없다. 서로 궁핍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서로 돕는다. 우리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의 토착적 공동체에서 상부상조 관계는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난은 절대로 배격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사람에게 제일 소중한 재산은 타자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관계 속에 존재하고, 내 인생이 윤택하다는 것은 내가 맺는 관계가 윤택한 것이다.
<시사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