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1] <무엇이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까?>
내가 자취를 시작한 것은 오년 전, 그 첫 시작은 ‘홍대’ 중심부의 원룸이었다. 홍대라면 젊은이의 메카, 유흥의 장소, 흥분의 나날(?)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늘 시끌벅적하고 금요일만 되면 야시시하고 예쁜 언니들, 못생기거나 잘생긴 오빠들로 가득했다.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것이니 차라리 시끄러운 동네에서 살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지만 유흥의 장소이긴 하나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망원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를 가면 ‘홍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성미산 마을이 있다. 성미산 마을은 행정구역이 아니다. 지난 1994년 ‘공동육아’를 참여한 부모 공동체가 모이고 모여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처음 어린이집에 들어간 아이들은 작년에 성인이 되었는데 그 중엔 내 친구도 있다. 나는 친구 어깨 너머로 해마다 마을 축제, 영화제, 운동회가 열리는 것을 훔쳐보곤 한다. 도둑놈 같이 참여하는 나도 이내 즐거워진다. 무엇이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까?
난 이 질문에 ‘사람을 배려해 만든 건축’은 현답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창조적인 건축가’도 아니라 본다. 아무리 쌈지건물이 ‘인간의 얼굴을 한 건축’이라고 이야기해도 그곳에는 ‘자본’이 있을 뿐 ‘문화’는 없지 않는가? 성미산의 나무와 꽃들은 마을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어준다. 아이들은 산에 나무를 심고 자기 이름표를 달아 놨다. ‘성미산을 ‘계발’하지 마세요! 라는 팻말도 볼 수 있다. 성미산 마을이 홍대보다 그리고 쌈지건물 보다 인간다울 수 있고 인간을 배려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한가지라고 본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들리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을 이웃들이 짧은 시간이라도 눈을 맞추며 이야기 할 수 있는 마을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2] <내 몸뚱이 하나 달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규합총서라는 옛 책을 보면 밥 먹기는 봄 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 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 같이 하고, 술 먹기는 겨울 같이 하라는 말이 있다. 밥과 국, 간장, 술을 먹을 때는 훈훈하게, 뜨겁게, 서늘하게, 차게 먹어야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설마 장(腸) 속에 켜켜이 들어가는 음식 이야기뿐일까. 내 몸뚱이 건장하게 달래기 위해 밥국장술 먹지만 그 것 하나에 삶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에는 합당한 때가 있고 방법과 행동이 있다는 것이다.
- 배영호(배상면주가 대표)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내 몸뚱이 하나 달래는 것 ‘조차’ 못한다. 몸이란 것이 원래 퍼져있으면 계속 퍼져있고 싶고, 먹으면 계속 먹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 같은데 난 그런 얄궂은 몸의 바람을 때, 방법 가리지 않고 충족시켜 준다. 바야흐로 이십년 동안 내리 이렇게 살았다.
지난 5월에는 세상에 태어난 지 스무 해가 되어 이제 나의 어른 됨을 알리는 성년식을 치렀다. 흔히 말하듯 인생을 계절로 나누어 본다면 나는 이제 막 훈훈한 봄을 지나 지금 여름을 맞고 있다. 밥 나이로 해석해 보자면 지난 날 훈훈한 밥 집어먹고 밥 힘으로 쑥쑥 커서 자랐으니 이제 뜨거운 국 힘으로 살아야 있는 날이 온 것이다. 성인식 때 예순 네 살 먹은 혜라니 할머니가 나에게 이야기 해 준 몇 가지 당부의 말이 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준 수많은 이야기 중 몸, 밥에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네 몸을 소중히 여겨라’, ‘네가 먹을 밥은 네가 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라.’ 어찌나 나의 마음을 찌르던지.
훈훈한 봄에 밥 힘으로 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다. 국 힘으로 버틸 뜨거운 여름을, 이제 미성년의 금지로부터 벗어나게 될 이 세상을 몸뚱이의 뜻이 아닌 내 뜻으로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여름을 여름답게 푸르고 무성지게 보낼 것이며 퍼지지 않고 많이 움직이고 많은 땀을 흘릴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내 몸뚱이 잘 어르고 달래, 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스무 살이 되어 내가 몸뚱이에게 할 수 있는 약속은 그것뿐이다. 내 널 잘 다스리리. 그리고 책임지리.(아마도)
[문제 1+]구경꾼의 사회 中 소도시와 비교해 대도시의 사회생활은 듣는 경우보다 '보는 경우'에 거대한 우위를 둔다. 구경꾼들은 서로를 구경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며, 카페에 앉아 다른 사람을 구경한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모르그에 가서 시체를 구경하고, 밀랍 박물관에서 실물처럼 만들어진 인형을 구경한다. 귀부인도, 댄디도, 여공도, 마차꾼도 모두 동일한 구경거리에 경탄한다. 구경거리 앞에서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무색해진다. 구경거리의 유혹은 신분적 구별에 대한 욕구보다 강했다.
답글삭제지금의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 오늘도 영화관 앞에는 스펙터클을 구경하기 위해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니 홈피를 구경하고 다닌다. 도시의 군중은 언제나 심심하다. 그들은 기회만 마주치면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구경에 수반되는 도덕적 책임에 개의치 않으며 구경에 몰두한다.
근대의 대중문화는 한마디로 Just Looking 과 Just Fun의 세계이다!
그래, 도시가(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스펙타클함을 인식하자. 이젠 무엇을 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냐가 중요하다. 이 말은 이은미씨의 인터뷰에서 사명감이라는 단어와 엮인다. 너무 많은 것들이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라고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어떻게 시체와 사랑에 빠진 파리지앵을 탐탁지 않게 쳐다볼 수 있을까. 우리도 그러한걸.
Just Fun은 도덕적 책임을 놓치고 갈 확률이 크다. (여기서 도덕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범위로) 나 아닌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근대의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가 조금 더 인간다워질 수 있으려면 도시는 다시 마을을 향해 가야한다.
때문에 다섯살훈이의 한강르네상스는 개똥이다. 흥
인권이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 하라는 것.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의 책에서 김두식 선생이 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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